마태복음 27장
22.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마태오의 복음서 27장 [공동번역 개정판]
22.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예수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자 모두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소리 질렀다.
23. 빌라도가 "도대체 그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으나 사람들은 더 악을 써 가며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24. 빌라도는 그 이상 더 말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기세가 보였으므로 물을 가져다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25.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26.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었다.
위 말씀을 아무리 읽고 묵상하여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죄인들은 유대 지도자와 유대 백성들이었다.
그런데 [사도신경]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하도록 하였다.
물론 "본디오 빌라도"가 당시 총독으로서 민란에 못 이겨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준 책임도 있겠지만, 더 큰 책임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강청한 유대 백성들이었다.
당시 민란이 얼마나 극에 달했으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에 대하여 아무 죄를 찾지 못하여 놓아주려 하였을 때,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강청하여 이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라고까지 하였을까?
"본디오 빌라도"는 민란에 감당이 안 되어 두 손을 씻고 "예수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그 죄를 당하라" 말씀하였다.
사탄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우고 그의 백성들, 곧 타락한 천사들에게는 죄가 없는 것처럼 만든 것이다.
태초에 하늘에서는 여호와(יהוה)의 말씀을 거역하고 땅으로 쫓겨난 타락한 천사의 무리들이 있었다.(에녹 3서)
타락한 천사들은 땅으로 쫓겨나 짐승들처럼 육신의 가죽을 덮어쓰고 살게 되는데, 이들의 시조가 "아담과 하와"이다.
본문 말씀을 아무리 읽고 묵상하여도 "본디오 빌라도"보다, 유대 백성들의 죄가 더 크다.
그런데 오늘날 [사도신경]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우고 있다.
[사도신경]을 만든 자들은 분명 성령의 권능으로 사역한 사도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도들은 성령 안에서 진리를 분별하므로 오늘날과 같은 [사도신경]의 교독문을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탄 "루시퍼(사타나엘)"는 그에게 속한 백성들, 곧 타락한 천사들에게 [사도신경]을 만들게 하여 그들의 죄를 느끼지 못하도록 미혹한 것이다.
다시 말해, "루시퍼"는 그의 무리들이 세상 죄를 깨닫지 못하도록 "본디오 빌라도"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운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한 분 하나님을 세 분 하나님으로 만들어, 여호와의 아들 예수를 여호와의 자리에 올려놓으려 하고 있다.
이는 태초 전에 덮는 그룹(Cherub)이었던 사탄(사타나엘)이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다가 땅으로 쫓겨난 것처럼, 예수를 하나님처럼 높여 그가 행한 행적을 그대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유대 민족들은 당시의 죄로 인하여 약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흩어져 수난과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죗값을 치르면서 당당하게 독립하여 세계를 지배하듯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열정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믿음과 신앙은 어떠한가?
이 그릇된 신앙조차 분별 못하고 살아가는 삶이 참으로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2022. 1. 31. 솨케드(שק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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